3대 전자상가 유일한 생존자, 국제전자센터의 전략
-게임, 가챠 성지 된 국제전자센터 -전자제품 빈자리 채운 '취미' -오프라인 상가, 찾아올 이유 있어야
전자상가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손님 맞을래요’의 위험을 피해 미로를 돌며 보물을 찾던 모험의 시대는 온라인 비교사이트의 등장과 함께 저물었죠.
한국의 3대 전자상가 중 필두로 꼽히던 용산전자상가와 강변테크노마트는 렌트프리에도 찾는 사람이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 여전히 사람들이 꾸준히 찾고, 급기야 핫플로 떠오른 곳도 있습니다.
주인공은 바로 서초동 국제전자센터입니다.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오타쿠 성지가 된 국전 9층… 상가 생명력 이어가
7월 말 찾은 서초동 국제전자센터는 다른 전자상가와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평일 오후에도 제법 분주하죠. 상대적으로 한산한 저층부를 지나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분주함은 더 늘어납니다. 그 분주함은 9층에 도달하면 절정에 달합니다.
9층은 콘솔게임 전문점과 함께 피규어, 굿즈 매장이 가득차 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2030세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가챠 기계가 대량으로 배치됐습니다. 사실상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전자상가가 게임, 피규어, 가챠 성지가 된 겁니다.
“(임대가) 자주 나오지는 않습니다. 3평 정도가 한 구좌라고 하거든요 나와도 어쩌다가 하나 나오는데” - 현지 공인중개사 A
덕분에 상가의 생명력도 연장되고 있습니다. 지금 월세는 평당 10만 원 정도로 강남 치고 대단한 임대료는 아닌 편인데요. 대신 재건축 이슈도 있어서 매물 잠금현상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즘에 재건축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지 한 8천 정도에 내놓으시네요. 원래는 한 4천 이랬었죠.” - 현지 공인중개사 B
물론 국제전자센터 전체가 호황인 건 아닙니다. 오디오, TV, 컴퓨터 등 옛 업종의 경우 전자상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죠. 대신 그 사이사이로 하나 둘 보이는 피규어, 가챠 매장들이 국전 9층의 영향력을 미루어 짐작하게 합니다. 9층으로 부족하니 다른 층으로 밀려나오고 있는거죠.
전자상가가 퇴장한 자리에 정착한 서브컬쳐
국제전자센터는 1997년 지어졌습니다. 초반에는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했는데, 차츰 콘솔게임을 중심으로 입소문을 타다가 2000년 중반 무렵에는 3대 전자상가로 등극했죠.
품목은 다양하지만 거친 영업행태로 소비자들의 애증을 쌓아온 용산과는 달리, 그나마 상대적으로 점잖은 영업방식으로 소비자들의 호평을 받은 상가이기도 합니다.
물론 국제전자센터도 가격비교 사이트의 등장과 온라인 시장 활성화로 침체의 길을 걷습니다. 이 과정에서 재미있는 변화가 발생하는데요. 다른 품목들이 고전하는 사이 9층의 콘솔게임 매장의 영향력이 커집니다. 최신 게임기와 소프트를 취급하고 중고거래도 가능한 거점이라 손님이 계속 있었죠.
이런 게임의 영향력도 팬데믹 무렵해서 주춤하게 되는데 이 영향력의 빈 공간을 차지하기 시작한 게 애니메이션 피규어 및 굿즈 가게들입니다. 고객층이 일정 부분 겹치는 면도 있었고, 전자상가의 쇠락으로 낮아진 임대료가 오타쿠 문화가 정착할 공간을 만들어준겁니다.
전통 전자상가에서 게임기의 비중이 높아지다가, 오타쿠 문화를 받아들이게 됐다는 건 2000년 무렵의 아키하바라와 비슷하죠. 이제와서는 2030 여성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끈 가챠기계를 대량으로 깔기 시작하면서 가챠 성지의 성격도 생겨났습니다.
용산·강변과 달랐던 국제전자센터의 운명
전자상가의 몰락은 사실 필연적이었습니다. 전자상가의 가장 큰 무기는 정보 비대칭성이었죠. 당시 전자상가를 찾는 사람들은 대기업 공식 대리점보다 저렴하고, 다양한 제품을 찾는 사람들이었는데요. 품목이 다양한 만큼 시세 파악도 어려우니 충분한 협상력과 정보력이 있어야만 만족스러운 거래가 가능한 야생이었습니다.
그래서 바가지를 쓰는 경우도 잦았고 심지어는 위협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런 분위기의 필두가 바로 용산이었죠. 그나마 내세울 건 가격경쟁력과 제품다양성 밖에 없었는데, 아예 용산 제품들의 시세를 취합해서 보여주는 가격비교사이트가 등장하자, 그러잖아도 없던 오프라인의 매력이 완전히 증발해버립니다.
어차피 온라인 판매자도 용산업자들이라지만 최소한 오프라인 매장에 찾아가서 불량한 업자들에게 기분나쁜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어졌죠. 이 대목에서 국전의 장점이 나옵니다. 국전은 분위기가 좀 달랐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는 호객행위가 적고 상대적으로 점잖은 분위기가 있었죠.
이런 분위기를 이끈 건 9층의 한 콘솔게임 매장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 곳은 정품만 취급하고, 호객도 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같은 가격으로 제품을 판매해 소비자들의 입소문을 탑니다. 같은 영업방식을 취하지 않으면 아예 손님을 받을 수 없으니 국전 자체 분위기도 그렇게 정착됐다고하죠.
온라인 거래가 본질적으로 안고있는 배송 전 까지의 불안함이 필요없는 상가와, 온라인만도 못한 신뢰성을 보여준 상가의 차이는 쇠락하는 속도차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겁니다.
'쇼핑은 온라인이 기본' 생존 위해 변신한 상업시설
오프라인 쇼핑의 의미 변화도 한 몫 했습니다. 오프라인 쇼핑은 이제 가격경쟁력으로 온라인을 이길 수 없게 되었죠. 더불어 배송 속도까지 빨라지고 보니 정량평가로 편익을 비교하는 품목들은 오프라인에서 소비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 영향은 비단 전자상가만이 아니라 모든 오프라인 상가에 영향을 미치고 있죠.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잘 되는 곳은 잘 됩니다. 스타필드, 용산아이파크몰 등이 대표적이죠. 특히 용산아이파크몰은 식음료MD, 팝업스토어에 가챠샵 등 즐길거리를 잔뜩 채워넣는데 주력했죠.
최신 오프라인 쇼핑 경험이 ‘쇼핑하는 김에 밥도 먹고 구경도 하는 것’에서 ‘놀다가 밥도 먹고 쇼핑도 하는 것’으로 바뀐겁니다.
국제전자센터의 콘텐츠도 자세히 보면 이런 오프라인이 아니고선 할 수 없는 체험들이 모여 있습니다. 게임기와 타이틀 매각은 오프라인 거점이 편리하고, 피규어도 실제로 품질을 눈으로 확인하고, 만져보고 사는게 선호됩니다. 특히나 가챠는 실제 뽑기를 통해 재미를 얻는 체험형 소비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죠.
역세권, 대로변… ‘유동인구에 속지 말 것’
국제전자센터의 생존과 용산아이파크몰, 스타필드의 공통점은 소비자가 그 곳을 방문해야만 하는 이유를 제공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건 상가 투자에 아주 중요한 교훈이죠.
‘역세권, 대로변, 1층, 항아리상권, 스트리트상권’은 거기에서 뭘 경험할 수 있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사람이 많이 올 수 있는 입지, 환경은 사실은 소비자의 방문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상가 분양 광고 문구를 조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늘도 한 줄 평으로 마치겠습니다. “대기업처럼 못할 거면 상가 하지맙시다”